학습/경제학

정책조언자로서 경제학자

ADWELL 2022. 1. 3. 19:15

실증적 분석과 규범적 분석

 경제학자가 담당하는 두 가지 역할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각각에서 사용되는 언어의 차이부터 살펴보자. 과학자와 정책조언자는 목표가 다르기 때문에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다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최저임금제에 대해 토론하면서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하자.

 

 폴리 : 최저임금제는 실업을 유발할 것이다.

 놈 : 정부는 최저임금을 인상해야 한다.

 

폴리와 놈은 지금 각자 다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폴리는 지금 과학자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지금 세상이 어떤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지 이야기하는 것이다. 반면 놈은 정책조언자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그가 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싶은지 이야기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 세상에 대한 견해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폴리의 입장처럼 실증적인 주장이다. 실증적 주장은 설명적인 것으로, 이 세상이 무엇인지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놈의 입장처럼 규범적인 주장이다. 규범적 주장은 처방적인 것으로, 이 세상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주장하는 것이다.

 실증적 주장과 규범적 주장의 중요한 차이점은 우리가 이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판단하는가에 있다. 실증적 주장(positive statements)은 기본적으로 나타난 증거를 검사함으로써 인정하거나 부정할 수 있다. 즉 폴리의 주장에 대해서는 최저임금 수준과 실업률의 관계를 나타내는 시계열 자료를 분석하면 될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규범적 주장(normative statements)에는 나타난 사실뿐만 아니라 가치관이 개입된다. 놈의 주장은 자료만 가지고는 판단할 수 없다. 무엇이 좋은 정책이고 무엇이 나쁜 정책인지 판단하는 것은 단순한 과학의 영역이 아니다. 거기에는 우리의 윤리관, 종교, 정치철학 등이 개입되는 것이다.

 물론 실증적 주장과 규범적 주장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속에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을 수 있다. 세상의 현상에 대한 실증적 이해가 정책에 대한 규범적 선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최저임금제가 실업을 유발한다는 폴리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놈의 최저임금 인상 주장은 거부되어야 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규범적 판단은 실증적 분석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실증적 분석과 가치관에 입각한 판단이 함께 적용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경제학은 실증적이다. 경제가 어떤 원리에 따라 작동하는지 설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경제학을 이용해서 어떤 규범적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경제가 보다 잘 작동하게 할 수 있는지 연구한다. 어느 경제학자가 규범적인 주장을 한다면, 그는 과학자로서가 아니라 정책조언자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정부 내 경제학자들

 미국의 해리 트루먼(Harry Truman) 대통령은 언젠가 제발 외팔이 경제학자를 만났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트루먼 대통령이 경제학자들에게 조언을 구하면 그들은 항상 "한편으로는(on the one hand) 이렇고, 다른 한편으로는(on the other hand) 이렇다"고 답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경제학자들의 답변이 종종 모호하다고 느낀 사람은 비단 트루먼 대통령만이 아닐 것이다. 경제학자들의 이런 경향은 제1장에서 살펴본 경제학의 10대 기본원리의 하나에 기인한다. 경제학자들 대부분의 정책 결정에 대가가 있다는 것을 안다. 어떤 정책은 효율을 위해 형평성을 희생할 수도 있다. 혹은 미래 세대를 돕고 현 세대를 손해 보게 할 수도 있다. 정책 결정이 쉬운 일이라고 말하는 경제학자가 있다면 그 사람 말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경제학자들의 조언에 의존한 대통령은 트루먼뿐만이 아니다. 1946년 이래 미국의 대통령들은 3명의 위원과 40~50여 명의 보좌진으로 구성된 '경제자문위원회(Council of Economic Advisers)' 의 조언을 받아왔다. 백악관과 불과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이 위원회는 대통령의 경제 자문과 1년에 한 번 「대통령 경제보고서(Economic Report of President)」를 발간하는 임무만 수행한다. 「대통령 경제보고서」에는 미국경제의 최근 동향에 대한 논의와 경제정책 현안에 대한 분석이 제시된다.

 미국 대통령은 각 행정부처에서 일하는 많은 경제전문가들의 도움도 받는다. 재무성에 있는 경제전문가들은 대통령이 조세정책을 입안하는 데 도움을 주며, 노동성에 있는 경제전문가들은 근로자와 구직자에 대한 자료 분석을 통해 노동시장 정책 수립을 돕는다. 법무성의 경제전문가들은 미국의 독점 금지 정책을 수행하는데 도움을 준다. 

 경제학자들은 행정부 밖에서도 활약하고 있다. 미 의회는 정책에 대한 독립적인 평가를 위해 '의회예산처(Congressional Budget Office)' 의 조언에 의존한다. 물론 의회예산처에도 경제전문가들이 있다. 미국의 금융정책을 결정하는 '연방준비제도(Federal Reserve)' 도 미국과 전 세계의 경제 변화를 분석하기 위해 수백 명의 경제전문가를 고용하고 있다.

 경제정책에 대한 경제학자들의 영향력은 정책조언자로서 역할에 국한되지 않는다. 경제학자들의 연구 결과와 논문들도 종종 경제정책에 영향을 미친다. 저명한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경제학자들과 정치철학자들의 아이디어는 그것이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강력한 영향력이 있다. 사실 이 세상은 바로 이들에 의해 움직인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지적 영향력에서도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실용주의적 사람들조차 사실은 어느 죽은 경제학자의 정신적 노예일 가능성이 높다. 허공에서 음성을 듣곤 하는 미치광이 권력자들은 몇 년전에 어느 학자들이 써놓은 낙서장을 통해 그들의 광기를 흡수하는 것이다.

케인즈가 이 말을 한 것은 1935년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진리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경제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어느 학자의 낙서장'의 주인공이 가끔은 케인즈 본인이기도 하다.

 

 경제학자들의 조언이 항상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이유

 대통령이나 다른 선출직 정치지도자들에게 자문을 해본 적이 있는 경제학자라면 누구나 자신들의 의견이 항상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현실에서 경제정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경제학 교과서에서 가정하는 이상적인 상황과 차이가 많다. 

 우리는 가장 좋은 정책은 무엇인가라는 한 가지 문제에만 관심을 가진다. 마치 정책이 선의를 가진 좋은 임금님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처럼 가정한다. 그리고 최선의 정책이 만들어지면 이를 그대로 현실에 적용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가정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최선의 정책을 찾아내는 일은 정치지도자가 해야 하는 일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이것은 오히려 쉬운 작업일지도 모른다. 대통령은 경제보좌관들에게 어떤 정책이 가장 좋은 정책인지 전문가로서 의견을 듣고 나면 다른 보좌진의 의견을 구한다. 홍보 담당 보좌관들은 그 정책을 국민들에게 어떻게 설명하는 것이 가장 좋은 전략인지,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켜 일을 더 어렵게 만들지는 않을 지 검토한다. 대통령 대변인은 언론이 그의 정책을 어떻게 보도할지, 신문 사설에서는 어떤 반응이 나올지 대통령에게 보고한다. 의회 담당 보좌관들은 국회의원들이 이 정책을 어떻게 볼지, 의원들이 대통령의 제안을 어떻게 수정하려 할지, 의회가 대통령 정책의 어떤 부분을 입법을 통해 반영할지 등에 관해 대통령에게 보고한다. 대통령 정치보좌관들은 어떤 단체가 지지를 선언하고 어떤 단체가 정책을 반대할지, 이 정책이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대통령이 추진하는 다른 정책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지 분석한다. 대통령은 이 모든 분석과 검토를 감안하여 정책을 어떻게 추진할지 결정한다. 

 대의 민주주의에서 경제정책을 만드는 것은 지저분한 과정이다. 대통령이나 다른 정치지도자들이 경제학자들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는 데는 모두 그만한 이유가 있다. 경제학자들이 정책 형성 과정에 중요한 기여를 하지만, 그들의 조언은 복잡한 의사결정 과정의 일부일 뿐이다.